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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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은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코틀랜드, 영국, 유럽의 문화 생활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루돌프 빙, 해리 하비 우드, 에든버러 시민들의 주도로 8월에 개최되었으며, 클래식 음악, 오페라, 발레, 연극, 시각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공연과 전시를 선보인다. 초기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글린드번 오페라 등의 참여로 시작되었으며, 1949년부터 시각 예술 전시가 추가되었다. 주요 공연 장소로는 어셔 홀, 킹스 극장, 로열 라이시엄 극장 등이 있으며, 매년 세계 초연 작품을 선보이기도 한다. 에든버러에서는 이 페스티벌 외에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에든버러 국제 영화제, 에든버러 국제 도서 축제, 로열 에든버러 군사 타투 등 다양한 페스티벌이 함께 개최되어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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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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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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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 날짜 | '2024': 8월 5일–28일 (정확한 날짜는 매년 다름) |
빈도 | 매년 |
위치 |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
처음 개최 | 1947년 |
후원자 | 엘리자베스 왕대비 (1947–1952) 엘리자베스 2세 (1952–2017) 에드워드 왕자 (2017–현재) |
웹사이트 |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공식 웹사이트 |
각주 | cite web |title=Edinburgh festivals cancelled due to coronavirus |url=https://www.bbc.co.uk/news/uk-scotland-edinburgh-east-fife-52121586 |website=BBC News |access-date=1 April 2020 |date=1 April 2020 |
다른 언어 이름 | 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
역사 | |
첫 번째 축제 | 1947년 |
코로나19 | |
2020년 축제 취소 |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취소됨 |
2. 역사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의 폐허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인간 정신의 개화의 기반을 제공하고" 스코틀랜드와 영국과 유럽의 문화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는 목표로 제1회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당시에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이 개최되었다. 페스티벌 창설자는 글린드본 오페라 축제 총감독이었던 루돌프 빙(en), 영국문화원의 스코틀랜드 대표였던 해리 하비 우드(en), 그리고 에든버러 시민 자원봉사자들이었으며, 페스티벌은 당초부터 8월에 개최되었다.
2. 1. 창립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의 폐허가 채 가시지 않은 1947년, "인간 정신의 개화의 기반을 제공하고" 스코틀랜드와 영국과 유럽의 문화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는 목표로 제1회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4]페스티벌의 아이디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구체화되었다. 영국 내 국제 페스티벌을 창설하려는 아이디어는 글린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의 총감독 루돌프 빙, 예술 후원자 로즈베리 여남작, 극장 감독인 터론 구스리 경, 그리고 존 크리스티의 아내인 오드리 밀드메이에 의해 처음 착안되었다.[4]
루돌프 빙은 전쟁의 상처를 예술로 치유하기 위해 페스티벌을 구상했다. 로즈베리 백작의 경주마 오션 스웰이 경주에서 우승하여 얻은 상금 10000GBP로 자금을 조달했다. 이 금액은 에든버러 시의회에서 매칭되었고, 이후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의장직을 맡은 영국 예술위원회에서 일부 자금이 매칭되었다. 빙은 또한 스코틀랜드 영국 문화원 원장인 하비 우드, 에든버러 대학교의 음악학과 교수인 시드니 뉴먼, 그리고 에든버러 시의 여러 시민 지도자들, 특히 존 팔코너 경과 함께 페스티벌을 공동 설립했다.[5]
하비 우드는 에든버러를 페스티벌 개최지로 추천했고, 팔코너는 이 계획을 열렬히 환영했다. 1946년 준비를 완료하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다음 해를 위해 계획이 세워졌다.[5]
2. 2. 초기 (1947년 ~ 1976년)
1947년, "인간 정신의 개화의 기반을 제공하고" 스코틀랜드와 영국과 유럽의 문화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는 낙관적인 목표 아래 제1회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당시에는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의 제1회)이 개최되었다. 이 페스티벌은 아직 제2차 세계 대전의 폐허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열렸다.[6] 페스티벌의 창설자는 당시 글린드본 오페라 축제(Glyndbourne Festival Opera)의 총감독이었던 루돌프 빙(en), 영국문화원의 스코틀랜드 대표였던 해리 하비 우드(en), 그리고 에든버러 시민들의 자원봉사자들이었으며, 당초부터 페스티벌은 8월에 개최되었다.
루돌프 빙은 예술의 언어를 통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페스티벌을 구상했다. 이것이 페스티벌의 주요 존재 이유(raison d’être)이다. 그것은 처음에 로즈베리 백작(Harry Primrose, 6th Earl of Rosebery)이 자신의 경주마 오션 스웰(Ocean Swell)의 상금 10000GBP로 자금을 조달했다. 오션 스웰은 1944년 조키 클럽 컵(British Champions Long Distance Cup)을 포함하여 전시 중에 열린 두 개의 주요 경주에서 우승했다. 이 금액은 에든버러 시의회에서 매칭되었고, 이후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의장직을 맡은 영국 예술위원회(Arts Council of Great Britain)에서 일부 자금이 매칭되었다. 빙은 또한 스코틀랜드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 원장인 하비 우드(Harvey Wood (arts figure))(Henry Harvey Wood), 에든버러 대학교(Edinburgh University)의 음악학과 교수인 시드니 뉴먼(Sidney Newman), 그리고 에든버러 시의 여러 시민 지도자들, 특히 존 팔코너 경(Sir John Ireland Falconer)과 함께 페스티벌을 공동 설립했다.
빙은 여러 영국 도시들을 살펴본 후 스코틀랜드로 초점을 옮겨 1939년에 방문하여 감탄했던 에든버러에 정착했다. 특히 에든버러 성은 그가 전쟁 전 페스티벌 감독을 맡았던 잘츠부르크를 연상시켰다. 하비 우드는 아이디어가 탄생한 회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에든버러 국제 음악 및 드라마 페스티벌은 1944년 말 런던의 하노버 스퀘어에 있는 한 레스토랑의 점심 식탁에서 처음 논의되었다. 전쟁 전 규모의 음악 및 오페라 페스티벌이 당분간 파괴되고 빈곤해진 중심지에서 열릴 가능성이 적다고 확신한 루돌프 빙은 1946년 여름 영국 어딘가에서 그러한 페스티벌을 개최할 가능성을 검토하고 조사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러한 기업이 성공적으로 운영된다면 유럽의 이 시점에서 일시적인 의미 이상을 가질 수 있으며 음악, 드라마, 오페라, 발레, 그리고 시각 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세계적인 중심지를 영국에 설립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나와 동료들을 설득했다.|에든버러 국제 음악 및 드라마 페스티벌은 1944년 말 런던의 하노버 스퀘어에 있는 한 레스토랑의 점심 식탁에서 처음 논의되었다. 전쟁 전 규모의 음악 및 오페라 페스티벌이 당분간 파괴되고 빈곤해진 중심지에서 열릴 가능성이 적다고 확신한 루돌프 빙은 1946년 여름 영국 어딘가에서 그러한 페스티벌을 개최할 가능성을 검토하고 조사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러한 기업이 성공적으로 운영된다면 유럽의 이 시점에서 일시적인 의미 이상을 가질 수 있으며 음악, 드라마, 오페라, 발레, 그리고 시각 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세계적인 중심지를 영국에 설립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나와 동료들을 설득했다.영어
그러한 중심지에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분명히 필요했다. 그것은 3주에서 한 달 동안 5만 명에서 15만 명 사이의 방문객을 수용하고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도시여야 한다. 잘츠부르크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경치와 그림 같은 매력을 가져야 하며 관광객과 외국 방문객에게 매력적인 국가에 위치해야 한다. 야심 차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절하게 공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극장, 콘서트홀, 야외 공간을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 기회를 받아들이고 페스티벌을 시청사뿐만 아니라,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모든 시민의 마음과 가정에서 중요한 관심사로 만들 의향이 있는 도시여야 한다. 매우 대담했지만 자신감이 부족하지 않았던 나는 에든버러를 중심지로 추천하고 예비 조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한 중심지에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분명히 필요했다. 그것은 3주에서 한 달 동안 5만 명에서 15만 명 사이의 방문객을 수용하고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도시여야 한다. 잘츠부르크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경치와 그림 같은 매력을 가져야 하며 관광객과 외국 방문객에게 매력적인 국가에 위치해야 한다. 야심 차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절하게 공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극장, 콘서트홀, 야외 공간을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 기회를 받아들이고 페스티벌을 시청사뿐만 아니라,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모든 시민의 마음과 가정에서 중요한 관심사로 만들 의향이 있는 도시여야 한다. 매우 대담했지만 자신감이 부족하지 않았던 나는 에든버러를 중심지로 추천하고 예비 조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영어[5]
최초의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은 1947년 8월 22일부터 9월 11일까지 개최되었으며, 2015년까지 8월과 9월에 걸쳐 개최되었다. 2015년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의 기간이 앞당겨져 8월에 시작과 끝을 맺게 되면서, 수년 전에 일정을 변경했던 프린지 페스티벌과 다시 일정을 맞추게 되었다.[6]
2. 3. 역대 페스티벌 감독
- 1947–1949: 루돌프 빙 경, 오스트리아 출신 오페라 기획자이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총감독 역임
- 1950–1955: 이언 헌터 경, 영국의 고전 음악 기획자
- 1956–1960: 로버트 폰손비, 영국의 음악 행정가이자 BBC 프로그램 기획자[3]
- 1961–1965: 조지 라셀스 헤어우드 7세 백작, 로열 오페라 하우스,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 오페라 노스에서 활동한 영국의 오페라 행정가
- 1966–1978: 피터 다이아만드, 베를린 출신 예술 행정가
- 1979–1983: 존 드럼몬드 경, 영국의 예술 행정가이자 BBC 라디오 3 총괄
- 1984–1991: 프랭크 던롭, 영국의 연극 연출가
- 1992–2006: 브라이언 맥마스터 경, 웨일스 국립 오페라에서 활동한 영국의 예술 행정가
- 2006년 10월–2014년: 조나단 밀스 경, 오스트레일리아 작곡가이자 예술 행정가
- 2014년 10월–2022년: 퍼거스 라인한, 아일랜드 연극 프로듀서이자 음악 행정가
- 2022년 10월–: 니콜라 베네데티, 스코틀랜드-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3. 주요 특징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은 1947년 8월 22일부터 9월 11일까지 처음 개최된 이후, 2015년까지 매년 8월과 9월에 걸쳐 열렸다.[6] 2015년부터는 페스티벌 기간이 앞당겨져 8월에 시작하고 끝나도록 변경되었는데, 이는 프린지 페스티벌과의 일정을 맞추기 위한 조치였다.[6]
페스티벌은 초기부터 클래식 음악, 오페라, 발레, 연극, 시각 예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종합 예술 축제로서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 클래식 음악: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브루노 발터의 협연을 시작으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존 바비롤리, 토마스 비첨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아르투어 슈나벨, 조셉 시게티, 롯테 레만 등 유명 연주자들이 참여했다.
- 오페라: 글린드번 페스티벌 오페라와의 협력을 통해 오페라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구성했으며, 라 스칼라, 슈투트가르트 국립 오페라, 코벤트 가든 오페라 등 세계 유수의 오페라단이 참여했다.
- 발레: 마르고 폰테인, 로버트 헬프만과 새들러스웰스 발레단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을 시작으로, 아메리칸 내셔널 발레 시어터, 덴마크 로열 발레단 등 다양한 발레단이 참여했다.
- 연극: 올드 빅 극장을 비롯하여 글래스고 시티즌 극장,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등 영국 주요 극단과 르 코메디 프랑세즈, 더블린 애비 극장 등 해외 극단이 참여했다. 데이비드 린드세이 경의 ''삼부작 풍자시'' 각색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시각 예술: 1949년부터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과 왕립 스코틀랜드 아카데미에서 주요 전시회가 열렸다.
연도 | 전시 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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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또한 T. S. 엘리엇의 《칵테일 파티》(1949년), 《기밀 서기》(1953년) 등 여러 작품이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에서 세계 최초로 공연되었다. 3. 1. 클래식 음악초창기부터 페스티벌은 다양한 장르를 다루었지만, 클래식 음악에 중점을 두었으며, 첫 시즌의 하이라이트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전 지휘자였던 브루노 발터와 함께한 연주였다. 그는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유럽을 떠났다.[7]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 페스티벌에는 많은 저명한 음악가들이 출연했다. 브루노 발터 외에도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존 바비롤리, 토마스 비첨, 에이드리언 볼트, 프리츠 부쉬, 요제프 크립스, 피에르 몽튜, 비토리오 귀,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 바이올리니스트 조셉 시게티, 그리고 가수 롯테 레만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말년에 에든버러에서 공연했다. ![]() 전후 유럽의 떠오르는 별들, 즉 지휘자 허버트 폰 카라얀, 라파엘 쿠벨릭, 샤를 뮌슈, 볼프강 사발리쉬, 레너드 번스타인,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 솔로몬, 루돌프 세르킨, 현악 연주자 예후디 메뉴힌, 피에르 푸르니에, 아이작 스턴, 아마데우스 현악 사중주단, 그리고 가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비토리아 데 로스 안헬레스, 보리스 크리스토프,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피터 피어스 등은 모두 경력 초기에 에든버러의 콘서트홀과 독주회장에 출연했으며, 장수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두 시대를 아우르는 경력을 가졌다. 초창기 가장 인상적인 연주자 중 일부는 1950년대에 경력이 단축되었는데, 특히 캐슬린 페리어, 귀도 칸텔리, 지네트 뇌뵈, 데니스 브레인 등이 그러하다. 에든버러는 페스티벌의 두 번째 10년(1957-1966) 동안 음악계의 중심에 남아 있었다. 그 당시 에든버러에서 공연한 주요 지휘자로는 오토 클렘페러, 에르네스트 안세르메, 게오르크 솔티,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 예브게니 음라빈스키, 이스트반 케르테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조지 세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등이 있다. 세 번째 10년(1967-1976) 동안 에든버러에는 새로운 그룹의 예술가들이 등장했는데, 그들 중 다수는 그 세기의 남은 기간과 다음 세기까지 음악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피에르 불레즈, 콜린 데이비스, 클라우디오 아바도, 쿠르트 마주어,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다니엘 바렌보임(피아니스트로도 자주 출연)과 같은 지휘자와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 알프레드 브렌델, 머레이 페라히아, 마르타 아르헤리치, 현악 연주자 자클린 뒤 프레, 잇착 펄만과 같은 독주자들이 포함된다. 또한 뛰어난 소비에트 예술가 그룹으로는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레오니드 코간, 그리고 소프라노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가 있다. 3. 2. 오페라에든버러 페스티벌 창립자들은 글린드번 오페라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처음부터 오페라는 프로그램의 중요한 부분이었다.에든버러는 당시에도, 지금도 독창적인 무대 오페라 제작에 이상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페스티벌에는 초청된 단체들이 참여했다. 초기에는 글린드번이 이 역할을 수행하여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매년 두 작품을 선보였다.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는 1952년에 6작품 이상을 선보이며 그 뒤를 이었다. 글린드번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매년 3편의 오페라를 공연하며 돌아왔고, 함부르크는 1956년에 4편의 작품을 가지고 다시 참여했다. 두 번째 10년(1957-1966) 동안 에든버러는 라 스칼라(피콜라 스칼라)을 시작으로 슈투트가르트 국립 오페라, 스톡홀름 왕립 오페라, 글린드번 오페라, 코벤트 가든 오페라, 벨그라드 오페라, 잉글리시 오페라 그룹,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부다페스트 오페라와 발레, 프라하 국립극장, 네덜란드 페스티벌,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등 다양한 오페라 단체들을 초청했으며, 매년 평균 4~5편의 작품을 공연했다. 또한 1965년부터 에든버러 페스티벌 오페라는 지역에서 제작된 공연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세 번째 10년(1967-1976) 동안 에든버러 페스티벌 오페라는 글래스고에 기반을 둔 스코틀랜드 오페라와 함께 주요 공연자였다. 한편, 독일의 베를린 도이체 오페라, 라인 도이체 오페라,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프랑크푸르트 시립 오페라, 이탈리아의 피렌체 코무날레 극장, 팔레르모 마시모 극장, 그리고 프라하 국립극장, 헝가리 국립 오페라, 스톡홀름 왕립 오페라, 잉글리시 오페라 그룹 등 초청 단체들의 전통은 계속되었다. 초기 30년 동안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토마스 비첨, 프리츠 부슈, 크리스토프 폰 도나니, 페렌츠 프릭사이, 알렉산더 기브슨,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 비토리오 귀, 라파엘 쿠벨릭, 게오르그 솔티, 알베르토 에레데, 야노스 페렌치크, 존 프리처드,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같은 지휘자들과 칼 에베르트, 피터 에베르트, 괴츠 프리드리히, 콜린 그레이엄, 장-피에르 포넬, 귄터 레너트, 조르조 스트렐러, 루키노 비스콘티, 비엘란트 바그너, 프랑코 제피렐리와 같은 연출가들이 에든버러에 왔다. 무대 오페라에 출연한 스타 가수들로는 빅토리아 드 로스 안젤레스, 테레사 베르간자, 마리아 칼라스, 리사 델라 카사, 일레아나 코트루바슈, 세나 주리낙, 비르기트 닐손, 마그다 올리베로, 레나타 스코토, 안야 실야, 엘리자베스 쇠데르스트룀, 조앤 서덜랜드,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 류바 벨리치, 루이지 알바, 세스토 브루스칸티니, 보리스 크리스토프, 페르난도 코레나, 제라인트 에반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니콜라이 게다, 티토 고비, 알프레도 크라우스, 조지 런던, 루치아노 파바로티, 피터 피어스, 헤르만 프레이, 주세페 디 스테파노, 볼프강 빈드가센, 프리츠 운더리히가 있다. 3. 3. 발레발레는 엠파이어 극장에서 마르고 폰테인, 로버트 헬프만과 새들러스웰스 발레단이 공연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였다.[1] 이들은 이후에도 파리의 발레 데 샹젤리제, 뉴욕의 아메리칸 내셔널 발레 시어터, 그랑 발레 뒤 마르키 드 퀴베(몬테카를로 그랑 발레), 필라르 로페스의 스페인 발레단, 유고슬라비아 발레단, 덴마크 로열 발레단 등의 발레단과 함께 여러 해 동안 페스티벌에 참여했다.[1]![]() 3. 4. 연극올드 빅 극장은 글린드본, 새들러스웰스처럼 초기에 페스티벌을 강력하게 지원했으며, 글래스고 시티즌 극장, 잉글리시 스테이지 컴퍼니,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트래버스 극장, 프로스펙트 극장, 영국 국립극장과 같은 다른 중요한 영국 극단들이 합류했다.페스티벌의 최초 연극적 성공 중 하나는 1948년 데이비드 린드세이 경의 ''삼부작 풍자시'' 각색 작품이 마운드에 있는 어셈블리 홀에서 1552년 이후 처음으로 공연되어 큰 찬사를 받았을 때였다.[8] 이 작품은 1948년, 1949년, 1951년, 1959년, 1973년에 재공연되었다. 전 세계 각지에서 극단들이 점점 더 자주 참여했다. 첫 10년(1947-1956)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에서, 두 번째 10년(1957-1966)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러시아, 폴란드에서, 세 번째 10년(1967-1976)에는 미국, 스웨덴, 아일랜드, 폴란드, 불가리아, 동독, 이탈리아, 루마니아, 일본, 벨기에, 스위스에서 왔다. 주목할 만한 극단으로는 르 코메디 프랑세즈, 뒤셀도르프 극장, 스트랫퍼드 온타리오 페스티벌 컴퍼니, 더블린 애비 극장, 프라하 발코니 위의 극장, 라마마 컴퍼니, 뉴욕, 그리고 일본의 능극과 분라쿠 극단이 있다. ![]() 초기에는 E. 마틴 브라운, 피터 우스티노프, 구스타프 그륀트겐스, 타이론 구트리, 마이클 벤솔 등이 주목받는 연출가였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프랭크 던롭, 리처드 에어, 토비 로버트슨, 루카 론코니, 안드레이 서반이 에든버러에 작품을 가져왔다. 초기에는 랄프 리처드슨, 알렉 기네스, 존 길구드, 시빌 손다이크, 루이스 캐슨, 엠린 윌리엄스, 클레어 블룸, 앨런 배델, 피터 핀치, 리처드 버튼, 페이 컴튼, 앤 토드, 에릭 포터, 에드위주 푸이예르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고, 안나 칼더-마셜, 데릭 자코비, 펠리시티 켄들, 이안 맥켈런, 존 네빌, 에드워드 페더브리지, 티모시 웨스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처음 출연했다. 3. 5. 시각 예술1947년과 1948년 처음 두 페스티벌에서는 시각 예술이 선보이지 않았지만, 1949년부터 중요한 행사의 일부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과 왕립 스코틀랜드 아카데미에서 주요 전시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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